세종의 마음경영백성을 감동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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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마음을 다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한 세종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백성을 감동시키는 정치였습니다. 가까이는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움직여 혼신을 다해 국가 일을 하게 했고, 밖으로는 백성들의 마음을 감읍시켰으며, 멀리는 명나라 황제까지도 감동시켰던 세종입니다. 요즘 방영하고 있는 과학드라마 [장영실]에서도 세종(김상경)은 주변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민 출신의 장영실(송일국)에게 벼슬을 주고 조선 최고의 기술과학자로 키워내는 등 그 누구도 따를 길 없는 위대한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이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 박현모의 [세종처럼]에는 이처럼 500년 역사와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리더 세종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데 이 중 세종의 마음경영 백성을 감동시켜라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써, 결과로써 백성을 하늘같이 섬겼던 세종의 큰 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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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마음경영 백성을 감동시켜라

가까이는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멀리는 국민들의 마음을 감읍시키는 것이 정치다

세종은 신하들의 말을 잘 들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샀다. 경연 등 어전회의에서 왕의 말을 최소화함으로써 신하들로 하여금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게 했다. 명재상 허조가 임종하면서 "우리 임금은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셨다"고 말한 것은 그 단적인 예이며, 문신 고약해(高若海)가 어전회의에서 논전을 하고 왕의 허락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던 일 역시 세종의 청정 리더십 덕분이었다.

그런데 세종시대에 무엇보다도 가장 감동을 받은 사람은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종래 짐승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었는데, 세종시대에는 그야말로 '나라의 근본'으로 존중받으면서 감읍했다. 그 후 백여 년 뒤 율곡 이이는 "세종께서 국가를 안정시켜 후손에게 잘 살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우리나라 만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고 했다.

노인을 공경하는 정치

세종은 노인을 공경하는 정치를 펼쳤다. "나이 많은 사람을 존경해야 효제(孝悌)의 풍속이 두터워진다"면서 90세 이상의 노인에게 관작과 봉작(封爵)을 제수하곤 했다. 천인인 경우 90세가 되면 남녀 모두에게 각각 쌀 2석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100세 이상인 경우는 남녀 모두 천인을 면해주었고 동시에 남자에게는 7품을, 여자에게는 봉작을 주어 "늙은이로 여기는 어짊"을 베풀었다. 여든 살 이상의 노인들에게는 관례에 따라 양로연을 베풀곤 했는데, 세종의 이 같은 양로의 정치는 많은 노인들을 감복시키고 즐겁게 했다.

특정적인 사실은 세종시대의 양로원에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노인들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재위 14년 승지들이 천민 출신 노인을 양로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자 세종은 "양로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비록 지극히 천한 자라도 모두 들어와 참예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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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정치

세종은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처지에 놓여 있는 병자나 죄수들이 잘못되지 않도록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예컨대 재위 16년 한여름에는 궁궐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활인원에 보내 열병을 앓는 사람들을 치료하게 했으며, 재판을 신속히 진행하도록 했다.

또한 세종은 가벼운 죄로 갇혀 있는 죄수는 보석으로 내보내게 했다. 너무 추운 날씨에는 신료들을 보내 추운 데서 자고 추위에 떠는 군인이 있다면 따뜻한 곳에 두어서 얼어죽지 않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세종은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편안한 삶과 죽음을 위한 정치

비명횡사나 요절과 같은 불행은 국가제도나 사회적 요건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의 노력으로 상당부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세종은 "천재와 지이(地異)의 있고 없는 것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배포 조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다할 수 있다고 말할 때 '사람의 힘'은 바로 세종에 대한 세종의 인식을 보여준다. 먼저 유아사망을 막기 위한 세종시대의 노력은 유명무실해진 제생원의 개선을 통해 이루어졌다. 즉 종래 서울 안에서 버려진 아이들은 제생원의 노비들에게 맡겨 기르게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생활이 군색한 사람들이어서 아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이에 세종은 제생원 옆에 집 3칸을 지어 각각 온돌방, 서늘한 방, 밥 짓는 곳으로 쓰게 하는 한편, 제생원의 노, 비 각각 한 명과 양민과 천인 중에서 꾸준한 마음이 있고 자원하는 사람에게 일정한 급료를 주며 구호하게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국가에서 겨울철에 덮을 것과 소금, 장, 진어, 젓갈, 미역 등의 물건을 모두 넉넉히 지급하도록 지시했다. 어린아이를 버린 자를 고발하면 상을 주는가 하면 버린 어린아이를 받아 기르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성명과 사는 마을, 아이를 주고받은 연월을 문서에 명백하게 기재해 뜻대로 기를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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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을 앞둔 여자 종은 물론그 남편인 남자 종에게도 한 달간의 산후휴가를 주었다

세종시대 노비의 휴가제도는 3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출산 후 휴가기간의 연장으로, 종래 관청의 여자 노비에게 출산 후 '아이를 돌보도록' 주던 휴가를 100일 늘리게 했다. 둘째는 출산 전 휴가제도의 도입으로, 재위 12년 출산 1개월 전부터 산모의 복무를 면제해 주게 하는 제도를 시행케 했다. 셋째는 남편 노비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

세종에 따르면 "그 남편에게는 전혀 휴가를 주지 않고 그전대로 일을 하게 하여 산모를 구호할 수 없게 하고 있으니, 이는 단지 부부로 하여금 서로 구원하게 하는 뜻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 때문에 간혹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었다"면서 천하에 돌봐줄 사람 없는 여자 노비를 '진실로 가엾게' 여기고 재위 16년부터는 출산을 앞둔 여종 자신은 물론이고 그 남편, 즉 남자 종에게도 한 달간의 휴가를 주게 했다. 그 외에도 세종은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맞거나 법에 걸리거나 원통하게 죽지 않도록 거듭 지시를 내렸다. 금주령을 내릴 때에도 약한 자 편에 섰고, 감옥에서 죄수가 억울하게 죽는 일도 없게 했다.

백성에게 누명을 씌운 관리는 엄벌하되 왕에게 험담한 백성은 용서했다

그 외에도 세종은 여연 지역의 군민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평안도 절제사 윤하를 문죄하는가 하면 정작 왕 자신을 나쁘게 말한 백성들은 용서하는 아량을 베풀었다. 그리고 여자 환자들이 남자 의사들의 진료를 받는 것을 꺼려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녀제도를 확장했다. 재위 5년에는 나이어린 지방의 관비 중 현명한 자를 뽑아 중앙에서 교육하고 다시 본고장으로 내려보내게 했다. 이 제안을 한 허도에 따르면 사람은 "그 위급한 때를 당하면 종실의 처자라 할지라도 의원을 구해 치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드디어 남자 의사로 하여금 살을 주무르게 하니, 그 남녀의 분별을 삼가는 뜻에 어긋난다"면서, 다른 한편 진찰해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끝내 질병을 다스리지 못하고서 요사(夭死)하는 자도 있다"는 보고를 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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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만들어 백성의 인식을 높이고 해시계를 만들어 시간이라는 정보를 공유케 했다

세종은 여기서 더 나아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앙부일구를 만들어 도성 가운데 내어놓았다. 무지한 백성들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지 않도록 우리말에 일치하는 글자를 창제해 배울 수 있게 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앙부일구, 즉 해시계를 만들되 백성들이 보는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앞에 놓도록 하여 무지한 자로 하여금 시각을 알게 한 세종의 의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이것은 권력과 돈을 가진 세력이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공유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종은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을 세워 자동 물시계가 알리는 시간을 경회루의 남문에서 월화문으로, 그리고 광화문 대종고로 '차례로 전하여 치게' 했다. 그리고 낮 오시에는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과 광화문의 종을 보루각의 시각에 맞춰 울렸다. 말하자면 양반 지배층들이 독점하던 '문자 권력'과 '시간이라는 정보'를 공개하여 백성들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사회에서 가장 낮은 신분인 노비조차도 "하늘이 낳은 백성"이라 보고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직책을 완수하기 위해 매일 새벽이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는 등 평생을 한 번도 게으르지 않게 살았다. 그 결과 "비로소 백성들의 살림이 넉넉해지고 인구가 많아졌으며"사람들은 각자 맡은 바 일을 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부부간 우애하는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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